심생은 이노선(二路線) 삼층(三層)에 살았다. 곧장 회의실 앞에 닿으면,
캐비넷에 오래 된 자료들이 있고, 책상이 있었는데,
두어칸의 책상은 제안서의 이면지를 다 놓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심생은 이면지질만 좋아하고 그의 처가 근근히 교통비 영수증 처리를 하여
입에 풀칠을 했다.
하루는 그 처가 몹시 배가 고파서 울음 섞인 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평생 제안서를 쓰지 않으니, 프린트는 해서 무엇합니까?"
심생은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아직 제안서에 익숙히 하지 못하였소"
"그럼 경쟁 피티라도 못 하시나요?"
"피티는 본래 성격이 낯을 가리는 걸 어떻게 하겠소?"
"그럼 광고주 접대라도 못 하시나요?"
"접대는 맞춰주질 못하는걸 어떻게 하겠소?"
처는 왈칵 성을 내며 소리쳤다.
"밤낮으로 엠채널을 하더니 기껏 '어떻게 하겠소?' 소리만 배웠단 말씀이오?
제안서도 못쓴다, 광고주 접대도 못한다면 차라리 노래방 접대라도 못하시나요?"
심생은 쓰던 이면지를 세절하고 일어나면서
"아깝다. 내가 당초 이면지 재활용으로 십년을 기약했는데, 인제 칠 년인걸..."
하고 휙 문 밖으로 나가버려다.
심생은 회사에 서로 알 만한 사람이 없었다.
바로 양재동 현대차로 가서 수위를 잡고 물었다.
"누가 이중에서 제일 부자요?"
경씨(經氏)를 말해주는 이가 있어서, 심생이 곧 팔층(八層) 경씨의 자리를 찾아갔다.
심생은 경씨를 대하여 길게 읍(揖)하고 말했다.
"내가 팀이 가난해서 무얼 좀 해보려고 하니, 1000억원만 꾸어주시기 바랍니다."
경씨는
"그러시오."
하고 당장 팀장 결재를 올려 1000억원을 내주었다.
이에, 심생은 감사하다는 인사도 없이 가 버렸다.
경씨팀의 차장들과 과장들이 심생을 보니
광고대행사 직원이었다.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다니며, 사무실에서는 슬리퍼를 이끌고,
사원증은 뒷주머니에 꽂혀있었으며,
심지어, 운영매뉴얼과 고객관리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은 제안서를 가지고 있었다.
심생이 나가자, 모두들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저이를 아시나요?"
"모르지"
"아니, 이제 하루 아침에 평생 누군지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천억원을 그냥 내던져 버리고 성명도 묻지 않으시다니,
대체 무슨 영문인가요?"
경씨가 말하는 것이었다.
"이건 너희들이 알 바 아니다. 대체로 제안서를 내미는
사람은 으레 컨셉을 대단히 선전하고, 획기적이라 자랑하면서도
내용은 작년 제안서와 같기 마련이거나,
그의 대행업체가 썼던 운영매뉴얼과 시스템 제안서를 들고와
중언부언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저 객은 형색은 허술하지만, 일단 처음부터 운영매뉴얼도
없이 와도 얼굴에 부끄러운 기색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 사람이 해보겠다는 제안이 작은 일이 아닐 것이매,
나 또한 그를 시험해 보려는 것이다.
안주면 모르되, 이왕 천억원을 주는 바에 성명은 무엇을 하겠느냐?"
심생은 천억을 입수하자, 다시 자기 집에 들르지도 않고 바로 한남동으로 갔다.
한남동은 제일기획, TBWA, 이노션 사람들이 마주치는 곳이요, 국내 마케팅의 길목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AE, AP, CD들을 모조리 두배의 연봉으로 사들였다.
심생이 사람을 몽땅 쓸었기 때문에 온 기업이 마케팅을 못할 형편에 이르렀다.
얼마 안가서, 심생을 업신여기던 기업들은 열배의 값으로 아웃소싱을 맡기게 되었다.
심생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천억으로 온갖 회사들의 마케팅을 좌우했으니, 우리나라의 형편을 알만하구나."
그는 다시 지하철을 타고 돌면서 2호선 라인 대학들의 경영, 신방 졸업생을 죄다 모으면서 말했다.
"몇 해 지나면 월드컵, 인천아시안, 평창 올림픽 마케팅은 못하게 될 것이다."
심생이 이렇게 말하고 얼마 안가서 과연 평창 홍보관 및 개폐막식을 못하게되었다.
심생은 코바코에 전화를 걸어 물었다.
"바다 밖에 혹시 마케터가 살만한 동네가 없던가?"
"있습지요. 언젠가 국회의원 외유와 접대를 위해 미국에 닿았읍지요. 아마 뉴욕 어딘가 쯤 될겁니다.
정부가 인프라를 조성하고, 기업은 인재를 중시하기에 사람들은 마케터를 보고도 무시하지 않습니다."
심생은 대단히 기뻐하며,
"자네가 만약 나를 그 곳에 데려다 준다면 함께 부귀를 누릴걸세"
라고 말하니, 코바코 사장이 그러기로 승낙을 했다.
드디어 비행기를 타고 동쪽으로 가 그 동네에 이르렀다. 심생은 5번가의 대로를 보며 실망하며 말했다.
"땅이 천키로도 못되니 무엇을 해보겠는가? 다만 옴니콤과 인터퍼블릭이 있으니 덴츠정도 될 수 있겠구나"
"이 동네엔 한국인 마케터라곤 없는데, 대체 누구와 더불어 사신단 말씀이오?" 코바코 사장의 말이었다.
"제안서가 있으면 한국인은 절로 모인다네. 제안서가 없을까 두렵지 한국인이 없는 것이야 근심할 것이 있겠느냐?"
이 때, 논현동, 신사동에 수천의 대행사, 기획사 사람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갑을 관계에서 병정까지 떨어진 이들이었으니 쉽사리 상황이 좋아지지 않았다.
심생이 대행사의 사장을 찾아가서 사장을 달래었다.
"열명이 백억의 취급고를 하면 하나 앞에 얼마씩 돌아가지요?"
"우린 광고주에게 추가 서비스를 제공하느라 다 뜯겨서 한푼도 안남지요."
"모두 결혼은 했소?"
"안했소."
"판교에 아파트는 있소?"
대행사 사람들이 어이없어 웃었다.
"결혼도 하고 판교에 아파트가 있는데 무엇때문에 괴롭게 회사를 다닌단 말이오?"
"정말 그렇다면 왜 광고주들의 압박에서 벗어나고, 결혼하고, 부유롭게 지내려 하지 않는가?
그럼 을 생활이라는 소리도 안듣고 살면서, 집에는 부부의 낙이 있을 것이오, 칼퇴근을 하며 걱정않고 길이 의식의 요족을 누릴텐데."
"아니 왜 바라지 않겠소? 다만 제안서를 채울 아이디어와 돈이 없어 못할 뿐이지요."
심생이 웃으며 말했다.
"마케팅질을 하면서 어찌 돈과 아이디어를 걱정할까? 내가 능히 당신들을 위해서 마련할 일이 있소. 내일 한남대교에 나와보오.
붉은 표지로 된 것이 모두 제안서이니, 마음대로 가져가구려"
심생이 대행사 사장에게 언약하고 내려가자, 1층의 보안요원이 그를 미친놈이라고 비웃었다.
이틑날 대행사 사람들이 출근하면서 버스를 타고 한남대교를 건너자, 과연 심생이 삼십만개의 제안서를 싣고 온 것이었다.
모두들 대경해서 심생앞에 줄이어 절했다. "오직 님만을 따르겠소이다."
"너희들 맘에 드는 제안서를 힘껏 짊어지고 가거라."
이에 사람들이 다투어 제안서를 짊어지었으나, 한 사람이 백개 이상을 지지 못했다.
"너희들 능력이 한껏 제안서 백개도 못 지면서 무슨 마케팅질을 하겠느냐
인제 너희들이 광고주 사이드로 가려고 해도 출신이 대행사니 갈 곳이 없다.
내가 여기서 너희들을 기다릴 것이니 한사람이 제안서 백개씩 가지고 가서 자신이 쓰던 제안서 포맷과
아이디어 노트들을 모두 가져오너라."
심생의 말에 대행사 사람들은 모두 좋다고 흩어져 갔다.
심생은 몸소 이천명이 1년간 가져갈 연봉을 준비하고 기다렸다.
대행사 사람들이 빠짐없이 모두 돌아왔다. 드디어 다들 비행기에 타서 뉴욕으로 들어갔다.
심생이 '을'을 모두 쓸어 가서 남양유업이 매우 기뻐했다.
그들은 독특한 마케팅 이론을 개발하고, 그 이론에 기반한 imc를 해내니 미국의 광고주들이 그들을 찾았다.
취급고에 적정한 15%의 수수료를 붙이니 1년에 반만 일해도 1인당 매출이익이 30억에 달하였다.
아카이브를 만들어 그들의 아웃풋을 기록하고 외부에 제공하니 전 세계의 기업들이 모두 그들에게 매달렸다.
또한, 칸 광고제와 뉴욕, 두바이, 싱가포르 광고제에서 각각 20개의 그랑프리를 휩쓸었다.
심생이 탄식하면서
"이제 나의 조그만 시험이 끝났구나"
하고, 이에 이셔우드가 회장으로 있는 글로벌 크리에이티브 협의회 10명을 모아놓고 말했다.
"내가 처음에 너희들과 미국에 들어올때엔 먼저 부하게 한 연후에 따로 한국으로 들어가 갑을 관계를 재정립하려고 했다.
그런데 한국의 클라이언트 사이드가 못따라가고 공정위의 표준계약서도 아직 정립되지 못했으니 나는 이제 여기를 떠나련다.
다만, 아이들을 낳거들랑 한국에선 인문학 공부를 못하게 하며, 무조건 공무원 시험을 보게하고 절대로 을 생활은 못하게 하여라."
다른이들의 여권을 불사르면서,
"가지 않으면 오는 이도 없으렷다."
하고 돈 5천억달러를 국민연금에 던지며,
"국민연금이 고갈이라는데 누군가는 늙기 전에 받겠지. 만수르도 5천억은 우습게 여기는데, 하물며 이런 작은 섬에서랴!" 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갑질을 했던 이들을 태우며 "이 동네에 화근을 없애야지" 했다.
심생은 한국을 돌아다니며 가난하고 의지 없는 사람들을 구제했다.
그러고도 5천억원이 남았다.
"이건 경씨에게 갚을 것이다."
심생이 가서 경씨를 보고 "나를 알아보시겠소?" 하고 묻자, 경씨는 놀라 말했다.
"그대의 안색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으니, 혹시 천억을 실패보지 않았소?"
심생이 웃으며,
"재물에 의해서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것은 클라이언트의 일이오. 천억원이 어찌 감성을 살찌게 하겠소."
하고 5천억원을 경씨에게 내놓았다.
"내가 하루 아침의 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이면지 재활용을 중도에 폐하고 말았으니, 당신에게 천억원을 빌렸던 것이 부끄럽소."
경씨는 대경해서 일어나 절하여 사양하고, 십분의 일로 이자를 쳐서 받겠노라 했다.
심생이 잔뜩 역정을 내어,
"당신은 나를 연금복권으로 보는가?" 하고는 직구한 52인치 OLED TV를 던져주고 가버렸다.
경씨는 가만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심생이 홍대입구역에서 내려 다 쓰러져가는 연희동 아파트로 들어가는 것이 멀리서 보였다.
한 늙은 밴드가 홍대입구에서 공연 준비를 하는 것을 보고 경씨가 말을 걸었다.
"저 연희동 아파트가 누구의 집이오?"
"심석사(진) 집입지요. 가난한 형편에 락음악과 만화책만 좋아하더니 하루 아침에 집을 나가서 5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다오."
경씨는 비로소 그의 성이 심씨라는 것을 알고 탄식하며 돌아갔다.
이튿날, 경씨는 받은 돈을 모두 가지고 그 집을 찾아가서 돌려주려 했으나, 심생은 받지 않고 거절하였다.
"내가 부자가 되고 싶었다면 5천억달러를 버리고 5천억원을 받겠소? 이제부터는 당신의 도움으로 살아가겠소.
당신은 가끔 나를 와서 보고 만화책이나 사주고, 락페 티켓이나 주오. 일생을 그리하면 족하지오. 왜 재물때문에 정신을 괴롭힐 것이오?"
경씨는 심생을 여러 가지로 권유하였으나, 끝끝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경씨는 그때부터 심생의 집에 만화책 신간이 나오면
몸소 찾아가 건네 주었다. 심생은 그것을 흔연히 받아들였으나, 혹 박인권이나 김성모의 작품을 가지고 가면 좋지 않은 기색으로,
"나에게 재앙을 갖다 맡기면 어찌하오?"
하였고, 혹 킹덤, 빌리배트 신간을 들고 찾아가면 아주 반가워하며 밤새 만화책을 읽었다.
이렇게 몇 해를 지나는 동안에 두 사람 사이의 의기가 날로 두터워 갔다. 어느날, 경씨가 5년 동안에 어떻게 5천억달러나 되는 돈을
벌었는가를 조용히 물어보았다. 심생이 대답하기를,
"그야 가장 알기 쉬운 일이지요. 조선이라는 나라는 을 사이드를 무시하고, 갑의 권위만 내세우니 인재가 자라기도 전에 사라지지요.
무릇 천억은 작은 돈이라 대기업 하나도 인수못하지만, 그것으로 먹고 살기 힘든 ae들과 마케터들을 독점하여 아웃소싱을 해주면 그만이지요.
얼핏보면 빠져나간 인재는 다른 사람으로 메꿀수 있을 것 같고, 광고나 프로모션은 하루살이나 행사질이라고 천박하게 불리지만,
그 때문에 졸업생들을 모두 독점해버리면, 인재들이 한곳에 묶여있는 동안에 모든 기업의 마케팅이 외국 회사를 이용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후세에 누군가 또 이방법을 쓴다면 그 때는 나라의 모든 기업이 망할 것이요."
"처음에 내가 선뜻 천억원을 꾸어 줄줄 알고 찾아와 청하셨습니까?"
심생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당신만이 내게 꼭 빌려 줄 수 있었던 것은 아니고, 능히 천억을 지닌 사람치고는 누구나 다 주었을 것이오.
내 스스로 나의 재주가 족히 천억원을 모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운명은 하늘이 주는 것이니, 낸들 그것을 어찌 알겠소?
그러므로 능히 나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똑똑한 사람이라 반드시 더욱더 큰 부자가 되게 하는 것은 하늘이 시키는일일 텐데 어찌 주지 않았겠소.
이미 천억원을 빌린 다음에는 그의 복력에 의지해서 일을 한 까닭으로 하는 일마다 곧 성공했던 것이고, 만약 내가 사사로이 했었다면 성패는 알수 없었겠지요."
경씨가 이번에는 딴 이야기를 꺼냈다.
"최근 그네 정부가 창조경제를 내놓으며 우리도 컨텐츠 생태계를 일으키자고 하니, 지금이야말로 지혜로운 인재들이 팔뚝을 뽐내고 일어설 때가 아니겠소?
선생의 그 재주로 어찌 괴롭게 파묻혀 지내려 하십니까?"
"어허, 자고로 묻혀 지낸 사람이 한둘이었겠소?
한국에서 컨텐츠 사업을 한다고 하면 열에 아홉은 신불자가 되며,
나머지 하나도 대기업에 CP로 들어가 살다가 결국은 폐업을 하기 마련이오. 지금의 집정자들은 가히 알만한 것들이지요.
나는 사업을 잘 하는 사람이라, 내가 번 돈이 족히 XX와 XXX를 살만하였으되 국민연금에 던져버리고 돌아온 것은
이 나라의 컨텐츠 생태계는 이미 막장이기 떄문이었지요."
경씨는 한숨만 내쉬고 돌아갔다.
경씨는 본래 콘텐츠진흥원장 홍XX와 잘 아는 사이였다. 홍원장이 창조경제를 위한 컨텐츠 관련 밑그림을 그리게 되어 경씨에게
창조경제에 혹시 쓸만한 인재가 없는가를 물었다. 경씨가 심생의 이야기를 하였더니, 홍원장은 깜짝 놀라면서,
"기이하다. 그게 정말인가? 그의 이름이 무엇이라 하던가?" 하고 묻는 것이었다.
"소인이 그분과 상종해서 3년이 지나도록 여태껏 이름도 모르옵니다."
"그는 이인이야. 자네와 같이 가보세."
밤에 홍원장은 보좌관들을 다 물리치고 경씨만 데리고 걸어서 심생을 찾아갔다. 경씨는 홍원장을 문 밖에 서서 기다리게 하고
혼자 먼저 들어가서 심생을 보고 홍원장이 몸소 찾아온 연유를 이야기했다. 심생은 못들은체하고,
"당신이 가져온 신간 만화책이나 어서 이리 내놓으시오." 했다.
그리하여 즐겁게 만화책을 보는 것이었다. 경씨는 홍원장을 밖에 오래 서있게 하는 것이 민망해서 자주 말하였으나,
심생은 대꾸도 않다가 야심해서 비로소 손을 부르게 하는 것이었다.
홍원장이 방에 들어와도 심생은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않았다. 홍원장은 몸둘곳을 몰라하며 나라에서 똑똑한 인재를 구하는 뜻을 설명하자,
심생은 손을 저으며 막았다.
"킹덤 31권을 다 읽어 가는데 말이 길어서 듣기에 지루하다. 너는 지금 무슨 어느 관직에 있느냐"
"한국콘텐츠진흥원 원장이오."
"그렇다면 너는 신임받는 창조경제의 수하군. 내가 데이빗 핀처, 주커버그 같은 이를 천거하겠으니,
네가 대통령에게 말해 삼고초려 하게 할 수 있겠느냐?"
홍원장은 고개를 숙이고 한참 생각하더니,
"어렵습니다. 제이의 계책을 듣고자 하옵니다." 했다.
"나는 원래 제이라는 것을 모른다"하고 심생은 외면하다가, 홍원장의 간청에 못이겨 말을 이었다.
"90년대 무분별한 시장 개방으로 한국 만화작가들과 지망생들, 한국의 음악인들은 지금 전부 배를 굶고 있고, 그 자식들도
부모의 직업으로는 나갈 생각을 안하고 있다. 너가 청와대에 청하여 한국 락페에 그들을 헤드라이너로 올리고,
네이X와 다X의 메인 화면 공간을 만화 작가들에게 무료로 나누어 주게 할 수 있겠느냐?"
홍원장은 또 머리를 숙이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어렵습니다." 했다.
"이것도 어렵다, 저것도 어렵다 하면 도대체 무슨 일을 하겠느냐? 가장 쉬운 일이 있는데, 니가 능히 할 수 있겠느냐?"
"말씀을 듣고자 하옵니다."
"무릇 천하에 국가 경영을 외치려면 먼저 천하의 인재들과 접촉하여 결탁하지 않고는 안되고, 인재를 모으려면 돈을 주지 않고는
성공할 수 없는 법이다. 지금 컨텐츠 관련 인재들이 먹고 살기 힘들어 대대행과 하청의 유혹에 넘어가,
클라이언트의 갑질이 매우 심해져, 갑을에서 갑을병정까지 넓혀지는 편이다.
진실로 컨텐츠 산업을 발전시키고자 한다면, 관련 인재들에게 충분히 돈을 주어야 할 것이다.
만화/스토리/기획 작가와 재야 학자, 벤처 사업자 등에게 평생 국가에서 보조하여 줄 것을 정책으로 보장하고,
그 예산을 대기업에서 걷어오면 컨텐츠 산업의 위상이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매년 3천명을 미국 할리우드와 실리콘밸리에 보내어
그들의 산업 노하우를 배워오고 시야를 넓힌다면 너희들이 말하는 창조경제를 명확화 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당장 컨텐츠 산업을 일으키지 못하더라도 그들이 배워온 토대가 향후 국가 인프라로 발전 할 수 있을 것이다."
홍원장은 힘없이 말했다.
"언론은 창조경제가 뭔지 모르고, 국민들은 토렌토로 공짜 다운로드만 받으려 하고 대기업은 아웃소싱으로만 돌리려 하니
누가 그런 정책을 시행할 수 있겠으며, 누가 돈을 보고 컨텐츠를 사서 보겠습니까?"
심생은 크게 꾸짖어 말했다.
"소위 정치인이란 것들이 무엇이란 말이냐? 조그만 나라에서 태어나 국민위에 있다고 뽐내다니, 이런 어리석을 데가 있느냐?
김모 의원은 파벌이나 조성하고, 안모 의원은 새정치를 한다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창조경제와 마찬가지인데
대체 무엇을 가지고 정책이라 한단 말인가? 강태공은 대의를 이루기 위해 70평생을 낚시를 하며 보냈고,
제갈공명은 오와의 동맹을 위해 오의 중신들과 토론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제 창조경제를 위해
컨텐츠 산업을 일으키겠다 하면서 내가 세가지를 들어 말하는데 너는 한가지도 행하지 못한다면서
그래도 신임받는 수하라 하겠는가? 신임받는 수하가 참으로 이렇단 말이냐? 너같은 자는 오공 본드를 부어야 할 것이다."
하고 좌우를 돌아보며 본드를 찾아서 부으려 했다. 홍원장이 놀라서 일어나 급히 현관으로 뛰쳐나가 도망쳐서 돌아갔다.
이튿날, 다시 찾아가 보았더니, 집이 텅 비어 있고, 심생은 간 곳이 없었다.
캐비넷에 오래 된 자료들이 있고, 책상이 있었는데,
두어칸의 책상은 제안서의 이면지를 다 놓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심생은 이면지질만 좋아하고 그의 처가 근근히 교통비 영수증 처리를 하여
입에 풀칠을 했다.
하루는 그 처가 몹시 배가 고파서 울음 섞인 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평생 제안서를 쓰지 않으니, 프린트는 해서 무엇합니까?"
심생은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아직 제안서에 익숙히 하지 못하였소"
"그럼 경쟁 피티라도 못 하시나요?"
"피티는 본래 성격이 낯을 가리는 걸 어떻게 하겠소?"
"그럼 광고주 접대라도 못 하시나요?"
"접대는 맞춰주질 못하는걸 어떻게 하겠소?"
처는 왈칵 성을 내며 소리쳤다.
"밤낮으로 엠채널을 하더니 기껏 '어떻게 하겠소?' 소리만 배웠단 말씀이오?
제안서도 못쓴다, 광고주 접대도 못한다면 차라리 노래방 접대라도 못하시나요?"
심생은 쓰던 이면지를 세절하고 일어나면서
"아깝다. 내가 당초 이면지 재활용으로 십년을 기약했는데, 인제 칠 년인걸..."
하고 휙 문 밖으로 나가버려다.
심생은 회사에 서로 알 만한 사람이 없었다.
바로 양재동 현대차로 가서 수위를 잡고 물었다.
"누가 이중에서 제일 부자요?"
경씨(經氏)를 말해주는 이가 있어서, 심생이 곧 팔층(八層) 경씨의 자리를 찾아갔다.
심생은 경씨를 대하여 길게 읍(揖)하고 말했다.
"내가 팀이 가난해서 무얼 좀 해보려고 하니, 1000억원만 꾸어주시기 바랍니다."
경씨는
"그러시오."
하고 당장 팀장 결재를 올려 1000억원을 내주었다.
이에, 심생은 감사하다는 인사도 없이 가 버렸다.
경씨팀의 차장들과 과장들이 심생을 보니
광고대행사 직원이었다.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다니며, 사무실에서는 슬리퍼를 이끌고,
사원증은 뒷주머니에 꽂혀있었으며,
심지어, 운영매뉴얼과 고객관리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은 제안서를 가지고 있었다.
심생이 나가자, 모두들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저이를 아시나요?"
"모르지"
"아니, 이제 하루 아침에 평생 누군지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천억원을 그냥 내던져 버리고 성명도 묻지 않으시다니,
대체 무슨 영문인가요?"
경씨가 말하는 것이었다.
"이건 너희들이 알 바 아니다. 대체로 제안서를 내미는
사람은 으레 컨셉을 대단히 선전하고, 획기적이라 자랑하면서도
내용은 작년 제안서와 같기 마련이거나,
그의 대행업체가 썼던 운영매뉴얼과 시스템 제안서를 들고와
중언부언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저 객은 형색은 허술하지만, 일단 처음부터 운영매뉴얼도
없이 와도 얼굴에 부끄러운 기색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 사람이 해보겠다는 제안이 작은 일이 아닐 것이매,
나 또한 그를 시험해 보려는 것이다.
안주면 모르되, 이왕 천억원을 주는 바에 성명은 무엇을 하겠느냐?"
심생은 천억을 입수하자, 다시 자기 집에 들르지도 않고 바로 한남동으로 갔다.
한남동은 제일기획, TBWA, 이노션 사람들이 마주치는 곳이요, 국내 마케팅의 길목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AE, AP, CD들을 모조리 두배의 연봉으로 사들였다.
심생이 사람을 몽땅 쓸었기 때문에 온 기업이 마케팅을 못할 형편에 이르렀다.
얼마 안가서, 심생을 업신여기던 기업들은 열배의 값으로 아웃소싱을 맡기게 되었다.
심생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천억으로 온갖 회사들의 마케팅을 좌우했으니, 우리나라의 형편을 알만하구나."
그는 다시 지하철을 타고 돌면서 2호선 라인 대학들의 경영, 신방 졸업생을 죄다 모으면서 말했다.
"몇 해 지나면 월드컵, 인천아시안, 평창 올림픽 마케팅은 못하게 될 것이다."
심생이 이렇게 말하고 얼마 안가서 과연 평창 홍보관 및 개폐막식을 못하게되었다.
심생은 코바코에 전화를 걸어 물었다.
"바다 밖에 혹시 마케터가 살만한 동네가 없던가?"
"있습지요. 언젠가 국회의원 외유와 접대를 위해 미국에 닿았읍지요. 아마 뉴욕 어딘가 쯤 될겁니다.
정부가 인프라를 조성하고, 기업은 인재를 중시하기에 사람들은 마케터를 보고도 무시하지 않습니다."
심생은 대단히 기뻐하며,
"자네가 만약 나를 그 곳에 데려다 준다면 함께 부귀를 누릴걸세"
라고 말하니, 코바코 사장이 그러기로 승낙을 했다.
드디어 비행기를 타고 동쪽으로 가 그 동네에 이르렀다. 심생은 5번가의 대로를 보며 실망하며 말했다.
"땅이 천키로도 못되니 무엇을 해보겠는가? 다만 옴니콤과 인터퍼블릭이 있으니 덴츠정도 될 수 있겠구나"
"이 동네엔 한국인 마케터라곤 없는데, 대체 누구와 더불어 사신단 말씀이오?" 코바코 사장의 말이었다.
"제안서가 있으면 한국인은 절로 모인다네. 제안서가 없을까 두렵지 한국인이 없는 것이야 근심할 것이 있겠느냐?"
이 때, 논현동, 신사동에 수천의 대행사, 기획사 사람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갑을 관계에서 병정까지 떨어진 이들이었으니 쉽사리 상황이 좋아지지 않았다.
심생이 대행사의 사장을 찾아가서 사장을 달래었다.
"열명이 백억의 취급고를 하면 하나 앞에 얼마씩 돌아가지요?"
"우린 광고주에게 추가 서비스를 제공하느라 다 뜯겨서 한푼도 안남지요."
"모두 결혼은 했소?"
"안했소."
"판교에 아파트는 있소?"
대행사 사람들이 어이없어 웃었다.
"결혼도 하고 판교에 아파트가 있는데 무엇때문에 괴롭게 회사를 다닌단 말이오?"
"정말 그렇다면 왜 광고주들의 압박에서 벗어나고, 결혼하고, 부유롭게 지내려 하지 않는가?
그럼 을 생활이라는 소리도 안듣고 살면서, 집에는 부부의 낙이 있을 것이오, 칼퇴근을 하며 걱정않고 길이 의식의 요족을 누릴텐데."
"아니 왜 바라지 않겠소? 다만 제안서를 채울 아이디어와 돈이 없어 못할 뿐이지요."
심생이 웃으며 말했다.
"마케팅질을 하면서 어찌 돈과 아이디어를 걱정할까? 내가 능히 당신들을 위해서 마련할 일이 있소. 내일 한남대교에 나와보오.
붉은 표지로 된 것이 모두 제안서이니, 마음대로 가져가구려"
심생이 대행사 사장에게 언약하고 내려가자, 1층의 보안요원이 그를 미친놈이라고 비웃었다.
이틑날 대행사 사람들이 출근하면서 버스를 타고 한남대교를 건너자, 과연 심생이 삼십만개의 제안서를 싣고 온 것이었다.
모두들 대경해서 심생앞에 줄이어 절했다. "오직 님만을 따르겠소이다."
"너희들 맘에 드는 제안서를 힘껏 짊어지고 가거라."
이에 사람들이 다투어 제안서를 짊어지었으나, 한 사람이 백개 이상을 지지 못했다.
"너희들 능력이 한껏 제안서 백개도 못 지면서 무슨 마케팅질을 하겠느냐
인제 너희들이 광고주 사이드로 가려고 해도 출신이 대행사니 갈 곳이 없다.
내가 여기서 너희들을 기다릴 것이니 한사람이 제안서 백개씩 가지고 가서 자신이 쓰던 제안서 포맷과
아이디어 노트들을 모두 가져오너라."
심생의 말에 대행사 사람들은 모두 좋다고 흩어져 갔다.
심생은 몸소 이천명이 1년간 가져갈 연봉을 준비하고 기다렸다.
대행사 사람들이 빠짐없이 모두 돌아왔다. 드디어 다들 비행기에 타서 뉴욕으로 들어갔다.
심생이 '을'을 모두 쓸어 가서 남양유업이 매우 기뻐했다.
그들은 독특한 마케팅 이론을 개발하고, 그 이론에 기반한 imc를 해내니 미국의 광고주들이 그들을 찾았다.
취급고에 적정한 15%의 수수료를 붙이니 1년에 반만 일해도 1인당 매출이익이 30억에 달하였다.
아카이브를 만들어 그들의 아웃풋을 기록하고 외부에 제공하니 전 세계의 기업들이 모두 그들에게 매달렸다.
또한, 칸 광고제와 뉴욕, 두바이, 싱가포르 광고제에서 각각 20개의 그랑프리를 휩쓸었다.
심생이 탄식하면서
"이제 나의 조그만 시험이 끝났구나"
하고, 이에 이셔우드가 회장으로 있는 글로벌 크리에이티브 협의회 10명을 모아놓고 말했다.
"내가 처음에 너희들과 미국에 들어올때엔 먼저 부하게 한 연후에 따로 한국으로 들어가 갑을 관계를 재정립하려고 했다.
그런데 한국의 클라이언트 사이드가 못따라가고 공정위의 표준계약서도 아직 정립되지 못했으니 나는 이제 여기를 떠나련다.
다만, 아이들을 낳거들랑 한국에선 인문학 공부를 못하게 하며, 무조건 공무원 시험을 보게하고 절대로 을 생활은 못하게 하여라."
다른이들의 여권을 불사르면서,
"가지 않으면 오는 이도 없으렷다."
하고 돈 5천억달러를 국민연금에 던지며,
"국민연금이 고갈이라는데 누군가는 늙기 전에 받겠지. 만수르도 5천억은 우습게 여기는데, 하물며 이런 작은 섬에서랴!" 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갑질을 했던 이들을 태우며 "이 동네에 화근을 없애야지" 했다.
심생은 한국을 돌아다니며 가난하고 의지 없는 사람들을 구제했다.
그러고도 5천억원이 남았다.
"이건 경씨에게 갚을 것이다."
심생이 가서 경씨를 보고 "나를 알아보시겠소?" 하고 묻자, 경씨는 놀라 말했다.
"그대의 안색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으니, 혹시 천억을 실패보지 않았소?"
심생이 웃으며,
"재물에 의해서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것은 클라이언트의 일이오. 천억원이 어찌 감성을 살찌게 하겠소."
하고 5천억원을 경씨에게 내놓았다.
"내가 하루 아침의 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이면지 재활용을 중도에 폐하고 말았으니, 당신에게 천억원을 빌렸던 것이 부끄럽소."
경씨는 대경해서 일어나 절하여 사양하고, 십분의 일로 이자를 쳐서 받겠노라 했다.
심생이 잔뜩 역정을 내어,
"당신은 나를 연금복권으로 보는가?" 하고는 직구한 52인치 OLED TV를 던져주고 가버렸다.
경씨는 가만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심생이 홍대입구역에서 내려 다 쓰러져가는 연희동 아파트로 들어가는 것이 멀리서 보였다.
한 늙은 밴드가 홍대입구에서 공연 준비를 하는 것을 보고 경씨가 말을 걸었다.
"저 연희동 아파트가 누구의 집이오?"
"심석사(진) 집입지요. 가난한 형편에 락음악과 만화책만 좋아하더니 하루 아침에 집을 나가서 5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다오."
경씨는 비로소 그의 성이 심씨라는 것을 알고 탄식하며 돌아갔다.
이튿날, 경씨는 받은 돈을 모두 가지고 그 집을 찾아가서 돌려주려 했으나, 심생은 받지 않고 거절하였다.
"내가 부자가 되고 싶었다면 5천억달러를 버리고 5천억원을 받겠소? 이제부터는 당신의 도움으로 살아가겠소.
당신은 가끔 나를 와서 보고 만화책이나 사주고, 락페 티켓이나 주오. 일생을 그리하면 족하지오. 왜 재물때문에 정신을 괴롭힐 것이오?"
경씨는 심생을 여러 가지로 권유하였으나, 끝끝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경씨는 그때부터 심생의 집에 만화책 신간이 나오면
몸소 찾아가 건네 주었다. 심생은 그것을 흔연히 받아들였으나, 혹 박인권이나 김성모의 작품을 가지고 가면 좋지 않은 기색으로,
"나에게 재앙을 갖다 맡기면 어찌하오?"
하였고, 혹 킹덤, 빌리배트 신간을 들고 찾아가면 아주 반가워하며 밤새 만화책을 읽었다.
이렇게 몇 해를 지나는 동안에 두 사람 사이의 의기가 날로 두터워 갔다. 어느날, 경씨가 5년 동안에 어떻게 5천억달러나 되는 돈을
벌었는가를 조용히 물어보았다. 심생이 대답하기를,
"그야 가장 알기 쉬운 일이지요. 조선이라는 나라는 을 사이드를 무시하고, 갑의 권위만 내세우니 인재가 자라기도 전에 사라지지요.
무릇 천억은 작은 돈이라 대기업 하나도 인수못하지만, 그것으로 먹고 살기 힘든 ae들과 마케터들을 독점하여 아웃소싱을 해주면 그만이지요.
얼핏보면 빠져나간 인재는 다른 사람으로 메꿀수 있을 것 같고, 광고나 프로모션은 하루살이나 행사질이라고 천박하게 불리지만,
그 때문에 졸업생들을 모두 독점해버리면, 인재들이 한곳에 묶여있는 동안에 모든 기업의 마케팅이 외국 회사를 이용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후세에 누군가 또 이방법을 쓴다면 그 때는 나라의 모든 기업이 망할 것이요."
"처음에 내가 선뜻 천억원을 꾸어 줄줄 알고 찾아와 청하셨습니까?"
심생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당신만이 내게 꼭 빌려 줄 수 있었던 것은 아니고, 능히 천억을 지닌 사람치고는 누구나 다 주었을 것이오.
내 스스로 나의 재주가 족히 천억원을 모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운명은 하늘이 주는 것이니, 낸들 그것을 어찌 알겠소?
그러므로 능히 나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똑똑한 사람이라 반드시 더욱더 큰 부자가 되게 하는 것은 하늘이 시키는일일 텐데 어찌 주지 않았겠소.
이미 천억원을 빌린 다음에는 그의 복력에 의지해서 일을 한 까닭으로 하는 일마다 곧 성공했던 것이고, 만약 내가 사사로이 했었다면 성패는 알수 없었겠지요."
경씨가 이번에는 딴 이야기를 꺼냈다.
"최근 그네 정부가 창조경제를 내놓으며 우리도 컨텐츠 생태계를 일으키자고 하니, 지금이야말로 지혜로운 인재들이 팔뚝을 뽐내고 일어설 때가 아니겠소?
선생의 그 재주로 어찌 괴롭게 파묻혀 지내려 하십니까?"
"어허, 자고로 묻혀 지낸 사람이 한둘이었겠소?
한국에서 컨텐츠 사업을 한다고 하면 열에 아홉은 신불자가 되며,
나머지 하나도 대기업에 CP로 들어가 살다가 결국은 폐업을 하기 마련이오. 지금의 집정자들은 가히 알만한 것들이지요.
나는 사업을 잘 하는 사람이라, 내가 번 돈이 족히 XX와 XXX를 살만하였으되 국민연금에 던져버리고 돌아온 것은
이 나라의 컨텐츠 생태계는 이미 막장이기 떄문이었지요."
경씨는 한숨만 내쉬고 돌아갔다.
경씨는 본래 콘텐츠진흥원장 홍XX와 잘 아는 사이였다. 홍원장이 창조경제를 위한 컨텐츠 관련 밑그림을 그리게 되어 경씨에게
창조경제에 혹시 쓸만한 인재가 없는가를 물었다. 경씨가 심생의 이야기를 하였더니, 홍원장은 깜짝 놀라면서,
"기이하다. 그게 정말인가? 그의 이름이 무엇이라 하던가?" 하고 묻는 것이었다.
"소인이 그분과 상종해서 3년이 지나도록 여태껏 이름도 모르옵니다."
"그는 이인이야. 자네와 같이 가보세."
밤에 홍원장은 보좌관들을 다 물리치고 경씨만 데리고 걸어서 심생을 찾아갔다. 경씨는 홍원장을 문 밖에 서서 기다리게 하고
혼자 먼저 들어가서 심생을 보고 홍원장이 몸소 찾아온 연유를 이야기했다. 심생은 못들은체하고,
"당신이 가져온 신간 만화책이나 어서 이리 내놓으시오." 했다.
그리하여 즐겁게 만화책을 보는 것이었다. 경씨는 홍원장을 밖에 오래 서있게 하는 것이 민망해서 자주 말하였으나,
심생은 대꾸도 않다가 야심해서 비로소 손을 부르게 하는 것이었다.
홍원장이 방에 들어와도 심생은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않았다. 홍원장은 몸둘곳을 몰라하며 나라에서 똑똑한 인재를 구하는 뜻을 설명하자,
심생은 손을 저으며 막았다.
"킹덤 31권을 다 읽어 가는데 말이 길어서 듣기에 지루하다. 너는 지금 무슨 어느 관직에 있느냐"
"한국콘텐츠진흥원 원장이오."
"그렇다면 너는 신임받는 창조경제의 수하군. 내가 데이빗 핀처, 주커버그 같은 이를 천거하겠으니,
네가 대통령에게 말해 삼고초려 하게 할 수 있겠느냐?"
홍원장은 고개를 숙이고 한참 생각하더니,
"어렵습니다. 제이의 계책을 듣고자 하옵니다." 했다.
"나는 원래 제이라는 것을 모른다"하고 심생은 외면하다가, 홍원장의 간청에 못이겨 말을 이었다.
"90년대 무분별한 시장 개방으로 한국 만화작가들과 지망생들, 한국의 음악인들은 지금 전부 배를 굶고 있고, 그 자식들도
부모의 직업으로는 나갈 생각을 안하고 있다. 너가 청와대에 청하여 한국 락페에 그들을 헤드라이너로 올리고,
네이X와 다X의 메인 화면 공간을 만화 작가들에게 무료로 나누어 주게 할 수 있겠느냐?"
홍원장은 또 머리를 숙이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어렵습니다." 했다.
"이것도 어렵다, 저것도 어렵다 하면 도대체 무슨 일을 하겠느냐? 가장 쉬운 일이 있는데, 니가 능히 할 수 있겠느냐?"
"말씀을 듣고자 하옵니다."
"무릇 천하에 국가 경영을 외치려면 먼저 천하의 인재들과 접촉하여 결탁하지 않고는 안되고, 인재를 모으려면 돈을 주지 않고는
성공할 수 없는 법이다. 지금 컨텐츠 관련 인재들이 먹고 살기 힘들어 대대행과 하청의 유혹에 넘어가,
클라이언트의 갑질이 매우 심해져, 갑을에서 갑을병정까지 넓혀지는 편이다.
진실로 컨텐츠 산업을 발전시키고자 한다면, 관련 인재들에게 충분히 돈을 주어야 할 것이다.
만화/스토리/기획 작가와 재야 학자, 벤처 사업자 등에게 평생 국가에서 보조하여 줄 것을 정책으로 보장하고,
그 예산을 대기업에서 걷어오면 컨텐츠 산업의 위상이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매년 3천명을 미국 할리우드와 실리콘밸리에 보내어
그들의 산업 노하우를 배워오고 시야를 넓힌다면 너희들이 말하는 창조경제를 명확화 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당장 컨텐츠 산업을 일으키지 못하더라도 그들이 배워온 토대가 향후 국가 인프라로 발전 할 수 있을 것이다."
홍원장은 힘없이 말했다.
"언론은 창조경제가 뭔지 모르고, 국민들은 토렌토로 공짜 다운로드만 받으려 하고 대기업은 아웃소싱으로만 돌리려 하니
누가 그런 정책을 시행할 수 있겠으며, 누가 돈을 보고 컨텐츠를 사서 보겠습니까?"
심생은 크게 꾸짖어 말했다.
"소위 정치인이란 것들이 무엇이란 말이냐? 조그만 나라에서 태어나 국민위에 있다고 뽐내다니, 이런 어리석을 데가 있느냐?
김모 의원은 파벌이나 조성하고, 안모 의원은 새정치를 한다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창조경제와 마찬가지인데
대체 무엇을 가지고 정책이라 한단 말인가? 강태공은 대의를 이루기 위해 70평생을 낚시를 하며 보냈고,
제갈공명은 오와의 동맹을 위해 오의 중신들과 토론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제 창조경제를 위해
컨텐츠 산업을 일으키겠다 하면서 내가 세가지를 들어 말하는데 너는 한가지도 행하지 못한다면서
그래도 신임받는 수하라 하겠는가? 신임받는 수하가 참으로 이렇단 말이냐? 너같은 자는 오공 본드를 부어야 할 것이다."
하고 좌우를 돌아보며 본드를 찾아서 부으려 했다. 홍원장이 놀라서 일어나 급히 현관으로 뛰쳐나가 도망쳐서 돌아갔다.
이튿날, 다시 찾아가 보았더니, 집이 텅 비어 있고, 심생은 간 곳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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